환경미화원... 그 옛날 내 아버지 직업...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날 아침...
쓰레기 수거 차량에 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계시는 환경미화원 분들을 뵈었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다니시며 정해져 있는 장소에서 놓여져 있는 쓰레기를 수거하며 타고 내리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그 분들을 뵈니 갑자기 옛 생각이 나더라.
이른 아침에 출근하시던 청소부 우리 아버지. 지금은 환경미화원이라고 좋은 단어가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그냥 청소부였다. 지금처럼 공무원 이라고 좋은 대우 혹은 대접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바라시던 청소차를 타시던 때가 생각이 난다. 청소차를 타시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새벽 2시에 일어나시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늘 8~9시 사이에 잠드셨고, 늘 피곤해하셨다. 그 땐 이해하지 못했다. 왜 우리 자녀들과 놀아주지 않는지...
하지만 좋았던 건 청소차를 타시면서 부터 수입이 조금 더 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물가물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기억이다. 청소차를 타기 위해 아버지가 많이 노력하셨고 그 노력하신 이유가 좀 더 수입이 좋다는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예전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청소차를 탄다고 모든 업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에는 청소차, 그리고 낮에는 청소부들에게 각자 맡겨진 청소해야할 구역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의 향기를 역시 그리 향기롭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맡기 힘들 정도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도와 쓰레기를 수거하고 다니기 시작한 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부터 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가 1991년도 때 이니 20 여 년도 더 되었다. 세월 참 빠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었을 때일 것이다. 아버지의 다리가 별로 좋지 못해서 일을 하러 나가기가 힘들었었다. '담'이라고 불리는 녀석이 아버지를 많이 힘들게 했다.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르며 느꼈던 항상 딱딱해져 있는 '담'이라는 녀석의 촉감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랑 동생이 주물러 주던 다리를 시원하다 하시며 이내 잠이 드시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첨에는 간간히 한번씩 도와 드리던 아버지의 일이 중학생이 되고 어느 때 부터인가 굉장히 잦아졌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도와 드리기 시작한 것이 고 2 초반 까지 약 6 여 년 정도를 매 주말마다 혹은 방학 때는 거의 출근 도장 찍듯이 그렇게 다녔었다.
종량제도 시행되지 않던 그 때 이런저런 분리되지 않앗던 쓰레기들이랑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까지 수거했었다. 그나마 겨울에는 괜찮았지만 여름에는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커다란 구루마('리어카'를 그렇게 불렀다.)를 아버지 대신 이끌며 구루마 높이보다 더 높이 쌓여진 쓰레기를 흘리지 않기 위해 나무 판자를 이용해 벽을 만들어 정해진 구루마의 크기보다 반절을 더 수거해야 끝났던 쓰레기 수거일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를 도와 주던 드리던 그때가 나는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격렬하게 사춘기를 겪던 그 시절... 부끄러워도 어쩔 수 없이 도와드릴 수 밖에 없는 이 환경에 나는 금새 적응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깨닫기를... 그런 아버지의 일을 부끄러워 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렇게 도와 드리기를 한해 두해 하다보니 어느새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 누가 경상도 남자가 아니랄까봐 어쩔 수 없는 그 묵묵함이란... 다정다감, 배려, 사랑... 이런 단어들이랑은 거리가 멀다보니 성숙하지 못한 그 시절에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전히 몰랐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들이 쌓이면 쌓일 수록 그렇게 철들어 가는 남자가 되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날이 좋은 상쾌한 아침.